학생항일운동 진원지 나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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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나주역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 183호로
나주역은 1929년 10월 30일 오후 4시경
나주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일어난
다툼이 계기가 되어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시작되어 전국으로
학생독립운동이 확산이 된 진원지입니다.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된 건물로 신축 당시 설계나 목수 등의
기록이 없어 원래의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923년 북쪽 벽에 이어 화물 창고를
증축했고 1970년 본건물의
지붕인 일본 기와를 슬레이티를 바꾸었으며
개찰구 위치를 외부에서 내부로 변경했을 뿐
기본 구조나 기둥 등의
목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원인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박기옥이
광주중학교 3학년인 후쿠다 쇼조 등의
일본 학생들의 희롱하는 모습을 발견한
사촌동생 박춘재 등과
싸움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생들과 광주중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이 되었고
싸움을 말리러 온 일본 경찰은
조선인 학생을 구타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3일 일왕
메이지 생일인 명치절 행사를 마치고
광주고등보통학생과 광주여자고등보통
광주농업학생 일부가 모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가 점점 격해지자 광주 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전국적 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소식이 알려져
우리의 독립심이 더욱 강하게 만들어 졌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했지만
1972년 잠시 폐지되었다가
1984년 9월 22일에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 강점기 때
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 옛 나주역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학생독립운동의 과정과 나주지역의 식민지적 상황
11.27 나주농업 보습학생과
나주보통학생의 만세사건
나주출신 학생 운동지도자 등을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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