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全羅道)의 '나(羅)'인 나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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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기원
나주는 옛 마한문화의 중심지인 불미국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군주 및 귀족들의 무덤인 고분군이
반남면에 경주 왕릉과 맞먹을 정도의 규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마한이 백제에게 정복당하며
불미국이 있던 지역은 발라군이 되었고
이후 신라의 통일 과정에서
멸망한 백제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대방주가 되었습니다.
남북국시대 때 통일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몰아낸 후
전국을 9주로 편성하면서
나주 지역에 발라주로 승격시켜 전남지방을
관할하는 곳으로 삼았지만
이후 9년만에 발라군으로 강등되었고
이후에는 금성군(금산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통일신라 멸망 이후 현재의 광주를 중심으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으나
궁예가 왕건을 파견해 금성군을 점령하고
나주라고 개칭했습니다.
고려시대의 나주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주요 거점지이며
그 뒤를 이은 혜종의 출생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성종이 지방행정단위인 12목 중
하나를 나주에 설치했으며
거란과의 전쟁 중 현종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종은 나주와 전주의 첫 글자를 따
전라도를 만들어 광역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나주목이었으며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23부재로
개편할 당시 나주부가 있었고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나주 평야는
손에 꼽힐 정도의 농업 생산력을 자랑하며
서남해안의 해운 및 영산강 수운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라도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그러나 1896년에 전라도가 남북으로 개편이 되면서
나주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쇠퇴의 결정적인 이유는 단별령의 시행으로
의병들의 봉기를 일으켜 그 과정에서
나주군수가 죽는 일이 발생해
나주 관찰사인 윤웅렬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광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광주에서 나주 의병들을 진압한 후에도
나주로 돌아가지 않고
조정에 광주에 처소를 두는 것을 허락을 받고 후
23부제에서 13도로 바뀔 때 광주에 도청이 세워짐에
따라 나주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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